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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각자의 마음 속 광기에 찬 조커 꺼내다 [서랍 속 Film]

Movie

by 꿈꾸는 잡다구리 2019. 11. 2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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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조커'

개봉 : 2019

장르 : 스릴러, 드라마

등급 : 15세 관람가

러닝 : 123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 재지 비츠, 로버트 드 니로, 프란시스 콘로이, 브래트 컬렌

 

시놉시스 :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남자. 하지만 모두가 미쳐가는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맨 정신으로는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제껏 본 적 없는 진짜조커를 만나라!

 

(※ 이 글에는 영화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TMI 리뷰. 강력 스포 리뷰임을 알려드립니다.)

 

 

SMILE

웃음. 여러 의미가 있다. 기쁠 때 짓는 표정을 두고 미소 혹은 웃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쁠 때만 웃음을 짓는 건 아니다. 슬프더라도 미소를 짓기도 한다. 기쁠 때 짓는 미소는 정상적이지만 슬플 때 짓는 미소는 정상적이지 않다. ‘조커속 아서의 웃음은 일단 정상적이지 않다.

 

아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웃기지 않은 상황에도 웃음이 터져버린다. 중요한 건 아서가 웃음이 터지는 상황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이에게 장난을 치던 아서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구박을 당한 뒤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서 웃는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울지 못해서 웃음을 터트리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아서가 웃을 때마다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것 같은 인상이 강하다. 영화 속에서 아서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아서는 슬플 때도 웃음을 터트리면 슬픈 감정을 쏟아내는 셈이다.

 

이는 아서를 둘러싼 사람들의 강요에 의한 걸지도 모른다. 아서의 엄마는 아서를 해피라고 부른다. 행복하지 않음에도 행복을 강요 받는 아서는 직장에서도 웃음을 강요 받는다. 아서가 직장을 때려치고 나설 때 계단 위에 붙어 있는 글귀는 늘 웃어라였다. 하지만 아서는 자신의 분노를 터트리며 이 글을 바꿔버린다. 아서의 직업인 광대 역시도 분장으로 웃는 얼굴을 그릴 뿐 진짜 웃지 않는다.

 

현대 사회도 이와 비슷하다. 워라벨, 힐링 등 꾸준히 매스컴에 등장하는 단어다. 내 삶은 죽겠는데 끊임없이 행복함을 강요하고 권장한다. 중요한 건 불행한 너를 바꿀 수 있는 건 너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입한다. 여기서 조커의 두번째 키워드가 등장한다.

CLASS

아서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세 사람을 죽인다. 자신을 구타하는 이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으로 인해 고담시는 대 혼란에 휩싸인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갈등. 하필 아서가 죽인 이들은 토마스 웨인의 직원들. 중요한 건 토마스 웨인의 직원들의 태도다. 그들은 잘 차려 입은 양복, 비싸 보이는 시계를 찬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하철에 함께 탄 여자에게 하는 행동은 무례하기 그지 없다. 더구나 때마침 웃음이 터진 아서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한다. 여기에 토마스 웨인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기름을 붓는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무능함, 비겁함을 비난한다.

 

자본주의 나아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결국 돈이 지위다.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무능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비난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가진 자들에게 기회마저 박탈 당한 채 치열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아서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의 꿈을 이뤄질 곳은 머레이 쇼뿐이다. 하지만 그에겐 기회조차 부여되지 못한 채 오로지 광대 일을 하는 게 전부다. 그렇기에 아서는 머레이 쇼에서 주목을 받는 상상을 하며 언젠가 그곳에 설 자신을 꿈꾼다. 하지만 정작 머레이 쇼는 아서의 코미디를 비웃음 거리로만 삼을 뿐이다.

 

이미 여러 나라를 통해 실패한 사회주의가 옳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1%의 소수가 99%를 소유하고 남은 99%1%를 갖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세상이 옳다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빠진 1%는 가지지 못한 다수에게 네게 행복하지 않은 게 사회적인 문제가 아닌 너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가진 그들에게 있어서 사회는 자신의 행복을 채워주는 완벽한 곳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행복하니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아서가 마지막 상담을 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점이 여실히 들어난다. 상담원은 아서에게 아서도 자신도 관심이 없다고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한다.

CONSIDERATION

계급은 계급을 낳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층이 생긴다. 이러한 계급은 사람에게서 배려와 존중을 빼앗아간다.

 

아서는 배려와 존중이 없는 사회를 비난한다. 상위 1%와 하위 99%만의 계급이 아니다. 99% 안에서도 계급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난한 집안, 아픈 엄마, 사회 부적응 등 다양한 요소가 아서를 99% 안에서 하위 1%로 끌어 내린다.

 

길을 지나가는 많은 이들이 노숙자를 보거나 정신질환을 가진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존중과 배려보다는 불쾌함이다. 특히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기괴하다. ‘조커에서 아서를 찾아온 형사의 태도, 길에서 일을 하는 아서를 공격한 아이들.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시선에 아서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만 했다. 코미디 클럽에서 아서는 남들이 웃은 뒤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서는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그들과 섞이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것이다. 마치 남들이 웃으니 자신도 웃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한국 영화 증인말미에도 보면 자폐아인 지우가 순호에게 자신이 특수학교에 가서 평범한 척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다. 배려와 존중이 없기에 일반적이지 않은 범주에 있는 이들은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인 척 해야 한다. 사실 이 말도 어폐가 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면 나와 너가 아닌 그냥 우리일 테니. 일반적, 비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나눈 것 자체가 배려와 존중이 없는 자세다.

ABUSE

배려와 존중이 없기에 관심도 없다. 그리고 방치하기 일수다. 아서의 엄마는 망상이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에게 아서의 입양을 허락한 사회. 그리고 아동 학대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성인이 된 아서는 엄마와 살고 있다. 결국 아동 학대에도 다시 엄마와 아서를 한 공간에 방치 했다는 의미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학대를 받게 되면, 더구나 그 학대가 유년시절이라면 그 마음의 상처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학대를 방치하다. 실제 사례는 뉴스를 통해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학대로 인해 분리 시킨 아이가 다시 부모에게 돌아갔다가 주검이 된 사건들. 이러한 학대는 결국 아서라는 인물 안에 조커라는 광기를 심는 것과 마찬가지다.

MADNESS

다시 웃음으로 돌아가보자. 행복함에 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광기에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아서의 웃음을 듣고 있으면 영화 아마데우스의 톰 헐스가 떠오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는 모짜르트의 웃음을 독특하게 연기했다. ‘아마데우스속 모짜르트의 웃음 소리가 아서의 웃음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웃음과 함께 또 다른 공통점은 광기다.

 

모짜르트는 기행을 저지르며 광기를 표출시키는 인물이다. 아서 역시도 사회적 무관심 속에 학대로 인해 방치되면서 가슴 속에 광기가 자란 인물이다. 아서는 랜들이 준 총의 방아쇠를 당겨 첫 살인을 하면서 광기가 풀려버린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광기 역시도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아서의 살인으로 인해, 경찰의 오발 사고로 인해 고담시의 시민들은 아서의 광기에 전염된다.

 

그리고 풀어진 광기는 소위 1%를 위협하기 마련이다. 광기에 빠진 고담시에서 토마스 웨인과 그의 아내는 브루스 웨인이 보는 앞에서 광대 탈을 쓴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여기서 만약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토마스 웨인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존중했다면, 토마스 웨인이 아서의 엄마를 방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소피가 엘리베이터에서 아서를 보며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하는 시늉을 한다. 현대 사회의 높아진 자살률. 불행한 사회, 삶태기니 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니 이러한 단어를 만든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가. 그리고 가지지 못한 다수의 불만이 광기로 변할 때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 조커는 대다수가 99%에 속한 이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다. 사회의 불만이 있는 이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광기의 조커. 이를 대리 만족 시키는 영화가 조커니까.

한 줄 평 : 또 다른 레전드로 기억될 조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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